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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공대 나와 무역 하면 바보 된다?…도전 자체로 즐거웠다” 작성일 : 2013-09-13 07:34

신영석 조회수 : 955
[기사] “공대 나와 무역 하면 바보 된다?…도전 자체로 즐거웠다”
“공대 나와 무역 하면 바보 된다?…도전 자체로 즐거웠다” 기사을 올립니다. 본 기사는 http://kecstory.tistory.com/607에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본 기사의 사이트를 참조하세요. ======================== [엔지니어열전⑨]글로벌 영업맨이 된 엔지니어 ‘문희철 동우화인켐(주) 부회장’ 얌전한 모범생, 고교 낙방 후 배짱 두둑 악바리로 변모 엔지니어 입사 1년 만에 최우수사원…일본 기술자 풀지 못한 문제 하루 만에 해결 큰 세상 보고파 대우 영업맨 도전, “전 세계 누비며 인생 즐겨” 인생 후반기 도전한 경영인…스미토모화학 최초 외국인 본사 임원 취임 "롤 모델이 없던 시절, 꿈 대신 목표 세워 살다보니 도전하는 인생 됐다" “어릴 적 꿈이 뭐였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물론 특별히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일은 있었지만 꿈은 없었거든요. 사실 1960-70년대는 눈에 보이는 성공이나 역할모델(role model)이 없었습니다. 당시엔 몇몇 예체능 분야를 제외하면 전공과 직업은 성적순이었죠. 구체적인 꿈보다는 하나하나 목표를 이루며 살아가던 시대입니다. 저와 동시대 사람들은 이해할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살아보니 오히려 50대부터 꿈이 생기더군요.” 문희철 동우화인켐(주) 부회장은 영어, 일어, 중국어, 스페인어, 불어 등 5개 외국어를 구사한다. 마라톤과 철인3종 완주 경력을 갖고 있고, 엔지니어에서 영업맨으로, 다시 경영자로 변신할 때마다 눈에 띄는 성과를 거뒀다. 현재는 소재분야 중견기업인 동우화인켐의 부회장이자 일본 스미토모화학 본사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외국지사장이 본사 임원이 된 것은 스미토모화학 100년 역사상 그가 최초였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한 문 부회장은 현재 누군가의 성공모델이지만 그는 “사실 오랫동안 특별한 꿈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인생의 전반기는 그저 열심히 산 것이 전부라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주저 없이 스스로 잘한 것을 꼽자면 한 번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도전을 통해 짜릿한 성공경험을 쌓으니 어느새 목표는 커지고 삶도 달라져있었다는 이야기. 금성전선의 금속가공 엔지니어에서 대우그룹의 글로벌 영업맨으로, 오리온전기 프랑스 공장 경영자에서 다시 외국계기업의 경영자까지, 흔치 않은 길을 걸어온 문 부회장을 만나 도전의 역사를 반추해봤다. ◆ 가난한 6남매 중 넷째…“어린 마음에도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야 하는 걸 알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문 부회장은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형제 서열에서 가운데 낀 사람들은 매우 활달하거나 아주 조용하거나 둘로 나뉘기 쉬운데, 어느 쪽이든 대체로 형제들 중 가장 독립심이 강한 편이다. 기대와 지원을 한 몸에 받는 맏이, 이해와 사랑을 독차지하는 막내와 달리 식구들의 관심에서 조금 벗어나있기 때문이다. 얌전하고 온순한 모범생이었던 그 역시 자신이 처한 환경을 일찍 깨달았다. 게다가 부친이 버스운수업을 할 만큼 부유했던 집안이 그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연이은 사업실패로 가세가 많이 기운 상황이었다. 예상과 달리 고입선발고사에서 지원한 서울고등학교에 낙방한 후 그는 어린 마음에도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닫고, 스스로 재수할 학비를 벌고자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침 모친의 스승이 오랜 외국생활 끝에 귀국, 국내 산업 발전을 위해 실업고등학교를 설립했고 집안의 설득으로 마지못해 입학하게 됐다. 처음 하는 기숙사 생활인데다 그의 동기들은 그와는 달랐다. 실업고등학교는 고입선발에서 3차에 해당했기 때문에 전국에서 남부럽지 않은 ‘거친 녀석들’이 모여들었던 것. 그런 친구들과 어울려 산으로 뱀을 잡으러 다니고 맘껏 운동하고, 기타를 치고, 금지된 담배를 배우며 그는 단 몇 개월 만에 얌전한 모범생에서 배포와 담력 있는 남학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는 실업고등학교에서의 1년을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으로 생각하고 지금도 그 기회를 감사히 여긴다. 적극적이고 용감한 성격으로 바뀐 것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그 안에 숨어있던 본인도 몰랐던 ‘악바리 근성’을 찾게 된 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수업시간, 교사가 장래희망을 조사했는데, 한참을 고민하다 그럴듯한 목표라며 그가 내놓은 대답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 공대를 나오면 취직은 크게 걱정 안 해도 되는 분위기였으므로 딴에는 꽤 현실적이면서도 훌륭한 꿈이었던 것. 하지만 교사는 그 자리에서 크게 비웃었고 ‘절대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는 호언으로 그에게 큰 상처를 줬다. 그 길로 학교를 나온 그는 교사의 표정과 행동, 말들을 떠올리며 3개월간 도서관에서 공부해 서울고등학교 재수에 성공했다. 그리고 1년 만에 이미 많은 부분에서 자란 그는 고1때부터 수학, 과학, 음악 등의 과목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스스로 학비와 용돈을 벌어 고교를 졸업하고, 목표였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합격했다. “3개월 만에 다시 원하던 고교에 입학한 것은 그 나이 대에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짜릿한 성공체험이었죠. 어렴풋이 ‘무엇이든 하면 되는구나’를 깨달은 것은 이후에도 아주 큰 힘이 됐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때 그 선생님의 표정, 그것이 원동력이었습니다.” ◆ 최우수사원 뽑힌 신입엔지니어…“공장 밖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그는 금성전선(현 LS전선)에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공장 생산직 직원들과 어울리며 기술적 개선 업무를 하는 것이 처음엔 재밌었다. 술과 운동을 좋아하는 그였기 때문에 기존 직원들과 빠르게 친해져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 알루미늄 전선을 최신 설비로 만드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됐는데, 거기서 그가 크게 한 건 하는 성과도 거뒀다. 일본 히타치에서 엔지니어 20명이 기술 전수를 위해 공장에 와있었는데 설비에 문제가 생긴 것을 3일이 지나도 해결하지 못하는 와중, 그가 생산직 고참 반장들과 의기투합해 하루 만에 문제를 찾아낸 것. 내심 콧대 높은 일본 엔지니어들에 불만이 있었던 선배들이 그 덕분에 사기가 올랐고, 이를 계기로 그는 입사 1년 만에 최우수사원에 선정됐다. 안팎으로 빠르게 인정받으며 해외연수 기회까지 얻게 되었지만, 그는 가끔씩 대학동기들이나 형들을 만나 이야기 할 때마다 현재 생활에 대한 아쉬운 부분이 생겨났다. 다른 사람들이 세상의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자신은 공장 일에만 매몰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특히 무역을 전공하고 대우에서 근무하던 친형이 해외출장을 다녀온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느껴졌다.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주변에서 “공대 나온 친구가 무역일 하면 바보 된다”며 만류하기도 했지만 그는 공장 밖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고, 또 공학 지식을 갖춘 세일즈맨으로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결국 ㈜대우로 옮긴 그는 철강 부문의 해외영업을 맡게 됐다. 당시 철강 구입과 판매는 안팎으로 굉장한 개척정신이 필요했다. 일단 국내에는 수출품목이 많지 않았던 터라 포항제철의 철강은 무역상사에서 가장 사고 싶어 하는 물건이었다. 덕분에 생산자인 포항제철이 오히려 콧대가 더 높아 물건을 확보하기 위한 영업맨들의 노력이 절실했다. 그 역시 첫 거래기관으로 포항제철을 맡으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짐 들어주기부터, 달력 배달, 각종 음식점 예약까지…. 간혹 성격 시험한다며 ‘왜 그렇게 서있냐’고 괜한 트집을 잡는 사람도 있었죠. 처음엔 자존심도 상했지만 이게 재산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초창기 시련은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그것을 통과하면 앞으로의 어려움도 견뎌내기 쉽죠. 덕분에 나를 낮추고 상대방의 기분을 만족시키는 감각은 제대로 배운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권위적이지 않고 겸손하게 살 수 있게 됐죠.” 그렇게 확보한 철강 물량은 대체로 미국에 수출됐다. 그는 영업맨으로 전환한지 2년 만에 뉴욕 주재원으로 발령이 나 4년을 미국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가 공학을 전공한 것이 빛을 발했던 것도 이 시점. 미국의 기업들은 제품에 약간의 문제만 생겨도 무조건 반품하고 배상청구(claim)를 걸었는데 그는 제품의 특성과 활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협상을 잘했다. “일단 내가 한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서 금속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운을 띄웠죠. 그리고 제품을 어디에 쓸 건지 묻고 거기에 맞게 제품의 절단과 추가비용 지원 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미국인들은 대체로 수긍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현지에서 업무 외에도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문화를 익혀나간 것이 협상하는 방식을 익히는데 주효했습니다.” 뉴욕 주재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3년 후 다시 마이애미 지점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철강 외에 전자와 부품소재 분야를 맡기 시작한 것. 국내외 분위기를 볼 때 해당 부분이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당시 고가의 컴퓨터 장비들을 자비로 구입해서 가지고 나가 직접 활용하며 익혔고, 이를 토대로 다루는 품목도 다변화했다. 그는 그 모든 과정이 “정말로 재미있었다”고 회고했다. “모르는 것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도전의 새로움과 강도, 크기가 세지는 것도 행복이었죠. 그때쯤 저에게 어마어마한 강도의 도전이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 . . . . (중략)